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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와 중국인, 포루트갈인

헷빛 2024. 1. 26. 15:50

말레이시아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주석 채취 배 모형

 

   19세기 들어 통조림 산업이 발달되면서 유럽에서는 주석 수요가 급증했다. 여기에 전기와 자동차 산업의 수요도 더해져 주석 수요는 한층 더 높아졌다. 말레이반도 서부지역은 1880년대 부터 거의 100년 동안 세계 최대 주석 생산지였다. 주석 광산의 소재지는 인구가 희박한 지역이었다. 때문에 주석 채굴은 중국인 이민 노동자들의 힘을 빌렸다. 
   1870년대까지 주석 채굴은 말레이인인 술탄으로 부터 허가를 받은 화인(중국인)자본가들의 독무대였다.
회당[원래는 청나라 말기에 反淸復明(반청복명) 즉  청왕조에 반대하며 명왕조를 다시 세우려 하는 민간의 비밀결사단체] 으로 불렸던 화인 조직이 중국 남부에서 해협식민지를 경유하여 대규모 중국인 노동력을 조달한 것이다. 1880년 대 이후로는 유럽계 자본에 의해 주석채굴도 어느정도 비율을 차지하긴 했지만, 중국인을 능가하지는 못했다.  이 무렵 말레이반도에서 주석산업 관련 주요도시는 빼락의 이뽀, 따이삥, 슬랑고르의 쿠알라룸프르, 끌랑 등이었다. 이중 빼락의 주도 이뽀는 주민의 70%가 중국인이었고, 따이삥은 "太平"이라는 한자어의 복건지방식 발음에서 유래했을 정도로 중국과 관련이 깊은 곳이다. 끌랑은 말레이시아 최대 항구도시인데, 역시 중국 대륙 노동자들이 상륙했던 곳이다. 현재 말레이시아 대표 음식 중 하나인 바쿠테(Bak kut the=肉骨茶)의 발상지이기도 한다. 참고로 바쿠테는 일종의 돼지갈비탕이다.
현재 말레이시아 인구는 3천2백만명 정도인데 중국계는 22%에 달한다.  
 
동남아시아에 최초로 진출했던 유럽 국가는 16세기의 포루트갈이다. 희망봉을 거쳐 인도양으로 진출했던 이들은 인도 서부해안 고아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들의 목적은 동남아시아의 후추를 비롯한 향신료 교역 독점이었다. 1511년 마침내, 향신료 집산지인 말라카를 점령했다. 포루트갈은 자체 군사거점을 설치한 것이다. 그리고  마카오에서 중국산 명주실을 싣고 일본 나가사키로 가서 대금으로 은을 받아오는 무역으로 큰 이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들은 향신료 교역을 독점하지는 못했다.
  이와중에 포루투갈인들은 점령지에 정착하여 상업 활동에 종사하는 한편, 총포나 대포 등의 무기조작에 숙달되었다는 잇점을 살려 버마, 싸얌 등 동남아시아 대륙부 지배자들의 용병으로서 활약하기도 했다. [참고; 임진왜란 당시 맹위를 떨쳤던 일본의 조총도 본래 1543년 당시 중국 영파로 향하던 포루트갈 무역선이 규슈의 다네가시마에 표착하며 일본에 전래된 것이다. 이로인해 화승총을 일본어로 '다네가시마'라 한다고 한다.]  포루투갈은 16세기 말경에는 쇠퇴했고 향신료 교역의 거점 말라카도 17세기 초엽에 네덜란드에게 빼겼지만 포루투갈인은 현지화하여 개인무역에 종사하는 상인으로 세력을 유지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