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말라카

헷빛 2024. 1. 26. 16:43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 말라카.
한때 번영했던 곳이다. 지금은 관광지로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지만. 
말라카가 번영했던 것은 이유가 있었다. 
말라카는 1403년 무렵 수마뜨라 팔렘방의 왕자 빠라메스바라가 쟈바 마쟈빠힛 왕국의 공격을 받아, 뜨마섹 [현 싱가포르]로 피신해 있다가 말라카 해협을 건너와 건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유타야와 마쟈빠힛 왕국 등의 압박을 받으면서 존망의 위기에 처했던 말라카왕국은 명나라 당시 남양 원정길에 나선 정화함대로 인해 구원될 수 있었다. 1405년부터 1433년까지 28년 동안 7회에 걸쳐 동남아시아에서 남아시아를 거쳐 아라비아반도와 동아프리카에 미쳤던 정화함대의 원정길에서 말라카는 보급기지 역할을 맡는 동시에 명나라에 대한 조공국이 되면서 독립을 지킬수 있었다. 이후 15세기 후반에는 인도양 향신료 무역의 확대에 힘입어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 것. 이러한 번영에는 몇가지 요인이 있었다.
  우선, 바람의 방향이다. 15세기 후반 동남아시아를 경유해 중국과 인도 사이를 왕복하려면 계절풍 방향이 바뀔때까지는, '배가 순풍을 기다리는'시간까지 포함해서 약 2년 정도가 소요되었다. 하지만 말라카를 중계항으로 삼아 그곳에서 중국 제품과 열대산물, 서방의 물품 등을 교환하면 남중국해의 정크선이 인도양까지 항해하거나 인도양의 다우선이 중국까지 갈 필요가 없고, 항해기간도 이전에 비해 절반가량으로 줄어들었다. 예들들면 중국의 정크선이 북동계절풍이 부는 시기의 말기쯤[3월 무렵] 말라카에 도착해 상품을 현지 상인들에게 팔아넘긴 뒤 서방 물품을 싣고 남서 계절풍이 불기 시작할 시기[5월 무렵]에 중국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었다. 
 다음은 후추이다. 15세기 후반 유럽시장에서 늘어나는 후추 수요를 감당하는데 적임지가 말라카였다. 말라카는 15세기 초엽부터 재배가 확대되었던 북수마트라의 후추생산을 독점할 수 있었다.  쟈버 북부 연안의 항구도시들도 말라카를 경유하지 않으면 향신료를 서방에 수출할 길이 없다.
   말라카왕은 인도 북서부구자라트의 무슬림 상인들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말라카 5대 국왕인 무자파르샤 재위기간인 1446~1459년에 이슬람교가 확고하게 정착되었다] 이후 동남아시아 항구도시국가의 수장들의 이슬람교  수용이 늘면서 동남아시아 해역국가들의 이슬람화가 본격화되었다. 
 
1641년 네덜란드는 포루트갈이 지배하던 말라카를 빼앗았다. 그 결과 포루트갈 세력은 동남아시아에서 쇠퇴하게 되고 말았다.